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쿄코지 전투 (문단 편집) === 하타케야마의 공세, 미요시의 출격 === 교토와 셋츠의 정세가 변화하는 동안 쿠메다의 승전자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는 야마토의 여러 국인중들을 포섭하여 군대에 합류시키고 카와치의 미요시 거점들을 공격, 낙성시켰다. 기세등등해진 하타케야마 군은 그대로 북상을 개시, 쿠메다 전투의 한달 뒤인 1562년 4월이 되자 나가요시의 거성인 이이 모리야마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타케야마 군보다 소규모였던 이이 모리야마 성의 농성군은 나가요시의 지휘 하에 두 차례의 총공세를 막아내며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버텨냈다. 공세를 계속한 하타케야마 군과는 달리 롯카쿠 군은 교토 점거 후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타카마사는 요시카타에게 속히 군을 움직일 것을 독촉했지만 요시카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미요시 군의 태세 정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5월 초까지 요시오키가 부른 셋츠의 국인중들과 나가요리는 물론이고 쿠메다 전투 뒤 후퇴하였다가 태세를 정비한 [[시노하라 나가후사]] 등의 짓큐 가신단이 지휘하는 군대까지 요시오키에게 합류하여 미요시군은 대략 5만 정도의 대군을 이루었다. 그렇게 규합된 미요시 군은 나가요시의 구원을 위해 출격, 남하를 개시하였다. 소식을 접한 타카마사는 모리야마 성의 포위를 풀고 후퇴하여 요시오키 군에 대한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포위가 풀린 것으로 한숨 돌린 나가요시는 휘하 농성군을 요시오키와 합류시키고 본인은 모리야마 성에 남았다. 이렇게 하여 약 6만에 달한 미요시 군과 4만의 하타케야마 군은 쿄코지 인근에 포진하고 대치하였다. 하타케야마 군의 철포대, 정확히는 하타케야마 군에 합류해있던 철포 용병대인 [[사이카슈]]와 네고로슈를 경계한 미요시 군은 철포를 사용할 수 없는 비오는 날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 그리고 그 원인이 된 경계심은 사이카슈 자체의 강력함 뿐 아니라 쿠메다 전투에서 짓큐가 전사한 원인이 네고로슈의 저격에 당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